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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사
MINJUEUN.
읽은 지 시간이 꽤 됐으나 아직도 뇌리에 선명한 김동인의 광화사는 그의 문학적 성향과 사상이 잘 나타나있다. 시대가 뒤바뀌는 1900년에 부유한 기독교집안에서 평양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귀공자처럼 자란 김동인은 문학의 예술성을 추구하여 본격적인 근대 문학의 확립에 기여했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 그의 글에서는 역시 유미적이며 탐미주의적인 그의 성향이 짙게 나타나 있다. 실제로 그는 톨스토이의 작품에 의해 문학에 입문하게 된 후 인간이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보는 자연주의적 경향과 예술지상주의적 경향을 보여준다.
사실 내가 처음 김동인의 단편 소설묶음에 끼어있는 광화사라는 제목을 접했을 때, 나는 이게 무슨 절 이름인 줄 알았다. 하지만 광화사는 기실 절과는 아무 상관없는, 미칠 광에 화공(화가)를 뜻하는, 즉 미친 화가라는 뜻이었다. 이 제목을 보고 사이코패스 화가를 연상했다면 바로 맞췄다. 아니, 그와 비슷하거나 거의 유사한 이미지라 하는 것이 좀 더 적확하겠다. 다만 김동인은 광화사의 화가가 하는 언동들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설득하면서 화사가 어째서 이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하는가를 명료하게 밝힌다는 점에서 우리가 그를 광인으로 취급하게 되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막는 구실을 한다.
광화사는 마치 나르시시즘에 빠진 것 같은 여(나)가 서울이 전부 내려다보이는 깊은 산에 가서 서울 풍경을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처음 몇 장은 계속 주변 풍경에 대한 묘사로 이루어져있는데 김동인은 이 대목에서 여가 보고 있는 풍경을 최대한 아름답게 묘사하려고 애를 썼음이 자명한 것 같은 수사들을 나열한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나는 이 부분이 약간 조잡하다는 생각을 했다. 여는 그의 등 뒤에 있는 동굴을 보고 음모의 도시 한양에 관련된 온갖 음모들이 떠올라 불쾌감을 느끼던 도중 멀리서 샘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뜬금없이 샘물을 의제로 글짓기를 시작한다. 사실 이 대목에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는데 이것은 여의 나르시시스트적 성향을 아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컨대 학문에 지친 선비가 슬렁슬렁 산에 가서 도시를 내려다보면서 느끼는 카타르시스나 우월주의 따위. 여하튼 이렇듯 광화사는 제법 참신한 방법인 소설 속의 인물이 들려주는 소설로 시작되는 소설이다. 그렇기에 광화사를 일컫는다면 그 소설을 말하는 여의 세상을 말하는지 여가 만들어내는 소설을 일컫는지 헷갈릴 요소가 있는 문장효과를 사용하기 때문에 앞으로 광화사는 여가 만들고 있는 소설, 즉 소설 속의 소설을 지칭하는 것으로 하겠다.
광화사는 세종 성주 시대의 화공인 솔거가 뽕밭에 앉아서 뭔가를 계속 기다리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뭘 기다리고 있을까? 우리가 이 질문을 해보기도 전에 솔거의 외모가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여에 의해 노골적으로 묘사되면서 독자로 하여금 어떤 종류의 혐오를 느끼게 한다. "코가 질병자루 같다. 눈이 퉁방울 같다. 귀가 박죽 같다. 입이 나발통같다. 얼굴이 두꺼비 같다."라는 이 구절은 몇 개의 형용사로 단박에 솔거를 비호감으로 결정짓는 요소가 된다.
솔거는 그 특유의 커다랗고 보기 드문 추악한 얼굴 때문에 단 한 번도 사람들 틈에 나와 본적이 없는 외모지상주의의 피해자라 볼 수 있는 은둔형 외톨이였고 그 외모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행복인지 불행인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두 번의 결혼 또한 완전하게 망쳤다. 실제로 16살의 솔거와 결혼했던 처녀는 그의 얼굴을 보고 기절한 후 깨어나자마자 도망쳤고, 다른 처녀는 그의 얼굴을 너무나 무서워해서 결국 그와 이혼했다. 혹자는 이 대목이 매우 웃겼다고는 하나 그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그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나로서는 이 대목이 우습다기보다는 그에 대한 일종의 연민을 느끼게 했다.
이러한 일이 있고 점차 여인을, 더 나아가 사람을 피하게 되어버린 솔거는 40년 동안 산 속에서 스승하고 그림만 그리며 살다 계속 똑같은 것만 그리다보니 권태감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 광화사가 말하는 솔거의 첫 변화이자 후에 일어날 모든 일의 원흉이다. 사실 40년 동안 아무하고도 안 만나고 그림만 그렸다는데 이제야 그 부작용이 나타난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긴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솔거의 외모와 그 콤플렉스로 인한 그의 현실도피는 솔거가 이런 권태감을 느끼는 연유를 충분히 정당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그의 이러한 권태는 표정을 그리고 싶다는 꽤 희한한 욕망으로 번져간다. 사실 오랫동안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표정을 그리기 힘들어진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 욕망이 커가는 도중 그는 아이러니하게 희세의 미녀였던 그의 어머니를 기억하고 그의 어머니보다 아름다운, 자기의 아내로서의 미녀 상을 그려보고 싶어졌는데 그 다음 구절은 50년의 솔로생활이 한 개인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보여주려는 양 장엄하기 짝이 없다.
"세상은 자기에게 아내를 주지 않는다. ...세상이 주지 않는 아내를 자기는 자기의 붓 끝으로 만들어서 세상을 비웃어 주리라. 이 세상에 존재한 가장 아름다운 계집보다도 더 아름다운 계집을 자기의 붓끝으로 그려서 못나고도 아름다운 체하는 세상 계집들을 비웃어 주리라. 덜난 계집들을 아내로 맞아 가지고 천하의 절색이라 믿고 있는 사내놈들도 깔보아 주리라. 사오 명의 처첩을 거느리고 좋다꾸나고 춤추는 헌놈들도 굽어보아 주리라. 미녀! 미녀!-눈을 감고 생각하고 눈을 뜨고 생각하고 머리를 움켜쥐고 생각해보나, 미녀의 얼굴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대목은 꽤 장엄했지만 그래서 더 우스웠다. 다만 이 대목이 이 소설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고 찌질한 솔거를 비웃으며 넘어갈 사람이 태반이라는 것은 후에 솔거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안타깝다. 솔거는 세상이 미웠다. 이 구절은 자못 유치한 수사로 오인될 여지가 없진 않지만 솔거는 자신의 흉측한 외모도 싫었고 그 얼굴 때문에 자신을 싫어하는 세상도 싫어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는 바로 미녀를 그리려고 결심한 순간부터 점차 미쳐가기 시작한다. 미녀를 그리고 싶긴 했지만 도통 사람의 얼굴이란 것이 생각나지 않으니 미녀들을 직접 보고 그리려고 마음먹게 된 솔거는 남들이 보면 스토커나 관음증 걸린 변태로 충분히 오인 가능할만한 행동들을 하게 된다. 예컨대 못생긴 얼굴을 숨기려고 얼굴을 싸매고 나서 여자들이 많이 모이는 우물가나 저자에서 어슬렁거리거나 약간 예쁜 여자라도 보이면 따라가면서 얼굴을 연구하는 것 따위의 행동 등등.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광화사의 첫 대목에서의 솔거는 뽕밭에 앉아 궁녀들의 얼굴을 연구해보려 앉아있었던 것이다.
물론 미녀를 그리려는 동기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역시 제 삼자가 보기엔 그의 그런 행동은 기실 단순한 남자들처럼 그냥 미녀를 보고 싶어 하는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사실 그 행동 자체도 인간들을 만나지 못해서 억제된 어떤 욕망의 억압에서 나오는 반작용으로 표출된 비정상적 동기에 의한 행동이니 솔거가 생각하는 것들이 타당하고 건전한 것들인지 의심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솔거는 미녀를 찾는데 빈번이 실패하던 도중 어떤 처녀를 만난다. 이 처녀에 대한 묘사와 그 때의 풍경에 대한 묘사는 굉장히 아름다워서 감히 여기에 인용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데, 놀랍게도 이 여자는 소경이라 솔거의 추악한 외모는 보지도 못하는-솔거에게는 천만다행일-처지였기에 솔거는 이 여자를 자신의 모델로 선택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집으로 데리고 가서 아내로 삼아버린다. 아내를 그리려고 했는데 그림의 모델을 아내로 삼아버리다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눈이 안보이지만 아름다운 여자와 얼굴은 못생겼지만 마음도 역시 못생긴 남자라면 그래도 괜찮은 로맨스 소설이 될 법하지만 솔거는 후에 자신이 그리고 싶은 "순결한 눈" 대신 "애욕의 눈"을 하고 있는 처녀의 멱살을 잡아서 "내가 이제 마지막 남은 눈동자를 그려야하니 그 때 그 아름다운 눈을 보여 봐라"라는 둥의 강요를 하려고 흔들던 도중 처녀를 죽여 버린다. 여기서 소경처녀가 죽어서 넘어질 때 벼루가 뒤집어지면서 먹물이 튀어 아직 눈동자가 그려지지 않은 그림의 눈에 원망의 눈동자가 그려진 후 솔거는 후회를 하면서 여생을 보내는 것으로 소설은 허무하게 끝난다.
나는 여기서 몇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우선 1)처녀의 가족은 왜 처녀를 찾지 않는 것인가와 2)왜 멱살을 잡고 흔드는 것만으로 허무하게 죽어버렸나 정도가 있는데 아무리 처녀의 말로는 가족들이 자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는 하나 묘사된 대로 그렇게 아름다운 소경이라면 주변 사람들은 하물며 가족까지 그녀를 찾지 않는다는 것은 역시 이상하거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소경처녀가 실제로는 아름답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이유는 1)묘사에서도 나오듯 소경 처녀는 "표정"이 아름답다고만 나와 있지 그 외모가 아름답다고 한 구절은 찾아볼 수 없음을 알 수 있고 2)최소한 30년간 사람들을 피해 살던 솔거의 눈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을 보통 사람들에게도 아름답게 느껴질지는 의문이고 3)소경 처녀가 있었던 장소가 산속 이었던 만큼 누군가에 의해 의도된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다보니 솔거의 눈에 그냥 아름답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야기를 짓는 여의 성격이 심히 의심되는 처녀의 죽음은 지나칠 정도로 과장되었다. 왜 처녀는 멱살로 흔들자 죽어버린 건가? 이것의 가능성은 몇 가지로 나뉜다. 1)솔거가 처녀를 직접 죽인 것을 멱살을 잡았는데 죽어버린 것으로 완곡하게 표현했거나 2)애초부터 처녀는 사람이 아니거나(그녀의 등장과 행동에는 모순적인 부분이 많다. 어쩌면 그녀 자체는 솔거의 뇌가 만들어낸 일종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3)여의주를 찾는 소경처녀를 막을 수 있는 명분이 더 이상 없는데 어떻게 해서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찾는 소경처녀의 환상을 깨지 않으면서 처녀의 아름다운 눈을 그려야하자 궁지에 몰린 솔거가 부득이하게 소경처녀를 죽이는 것으로 스토리를 구성한 여의 책임이거나 김동인의 의도적인 연출이거나 하는 둥의 가능성은 역시 소설을 이해하기 힘들게 하지만 우리는 애초부터 김동인이 톨스토이의 작품에 영향을 받아 자연주의적 경향과 예술지상주의적 경향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김동인이 광화사를 통해 말하고 싶은 바를 이해할 수 있다.
사실 김동인은 한때 일본의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화가가 되려고도 했었는데 중도포기 후 소설가의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그가 단순히 그림에 관한 글을 써보고 싶어서 광화사를 썼다는 가설도 충분히 신빙성이 존재한다. 김동인은 피상적으로는 광화사를 통해 예술가의 윤리성을 묻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곳곳에서 흐르는 초자연적인 광기는 역시나 알 수 없는 찝찝함을 풍기는 것이 흡사 북미의 남고딕 문학작품을 읽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초자연적인 힘은 소경처녀가 죽을 때 튀었던 먹방울이 미완성의 그림을 완성시켰을 때 정점에 다다르는데 이때는 마치 어떤 괴담의 한 순간마냥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김동인의 광화사는 나에게 어떤 씁쓸함을 안겨줬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50년의 솔로생활로 미쳐버린 노총각의 발악”이라 할 수 있는-어쩌면 이게 부제일수도 있는-이 짧은 단편소설은 그러나 어떤 심오한 철학이나 사상, 혹은 김동인 본인의 사고관념이 짙게 깔려있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그의 또 다른 작품인 배따라기나 감자와 함께 그의 세상을 잘 알 수 있는 소설이라 생각한다. 사실 김동인의 작품은 언제나 여주인공이 죽거나 도망가서 누군가가 후회하는 비극으로 끝나는데, 그의 삶은 방탕한 생활과 연이은 사업의 실패로 이루어져 있기에 그의 작품에 나오는 후회하는 남자들은 기실 충분히 김동인 본인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솔거가 선택한 것은 무엇인가? 그는 예술을 위해 자신을 속였다. 같은 예술가로서, 나는 솔거가 한 행동이 썩 바람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에 내가 솔거였다면 나는 소경처녀에게 진실을 만한 후 그녀를 행복하게해서 얻은 진정한 의미로서의 고결한, 아름다운 눈을 그리겠다. 솔거가 백날 그리던 그림은 결국 거짓 그림이었다. 그가 생애의 첫 50년간 그리던 그림은 표정이 없는 인물들로 이루어진, 오직 자신만을 위한 그림이었기에 거짓 그림이었고, 소경처녀 그림의 완성을 위해 어떠한 짓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기에 일견 숭고해보이던 그의 모습은 그러나 추악한 실체를 감추고 예술의 탈을 쓴 파렴치한 거짓 나부랭이에 불과했다. 소경처녀의 황홀한 표정을 화폭에 담기위해 거짓을 말하면서까지 그녀의 아름다운 표정을 그리고 싶었던 솔거는 어째서 소경처녀를 진심으로 행복하게해서 진실 된 표정을 얻는다는 발상을 하지 못했을까?
애초에 솔거가 처녀에게 용궁에 대해 설명한 것이 거짓이라 고해서 소경처녀가 지었던 표정까지 거짓이라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경처녀의 그 표정이 거짓이라고 장담한다. 이것은 마치 누군가에게 마약을 먹이면서 누군가가 짓는 표정과 마찬가지로 표정을 짓는 사람에게는 진실일수도 있는 표정이지만 그 표정이 어떤 종류의 매개체나 촉매제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가식적인, 계획적인, 누군가가 원해서 보이는 일종의 쾌락에 의한 천한 표정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표정은 아름다운 표정이기에 아름다운 표정이지 아름다운 표정이어야 하기에 아름다운 표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솔거의 음울한 마지막 모습에서 나는 솔거의 마음을 통찰할 수 있었다. 그는 바로 소경처녀의 진실한 표정대신 가식적인 표정만을 구했던 자기 자신을 하나의 예술가로서 책망하고 있었다. 예컨대 소경처녀를 죽이고서야 비로소 완성된 그림을 그렇게나 소중히 여기며 자기 자신의 죄를 속죄하려는 듯 돌아다니던 모습들이나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을 정도로 그 그림을 너무도 소중히 여기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그의 처절한 회한과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50년을 소비해야했다. 씁쓸한 고독과 세상에 대한 어떤 분노와 함께. 그리고 그 깨달음을 위해 어쩌면 그의 생애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됐을지도 모를 사람을 잃었다는 값비싼 희생은 나로 하여금 어쩌면 솔거가 이미 진정한 의미로서의 예술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단상을 하게했다.
예술의 진실성과 진정성을 깨달았다는 점에서 솔거는 이제야 진정한 예술가에 어울릴만한 자격을 갖추게 됐지만 그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몇 년이었다. 그는 그렇게 수년간을 방황하다 눈보라 치는 날 쓸쓸히 죽었다. 그 그림을 깊이 품에 안고선 마치 소경처녀에 대한 미안함을, 후회감을 그렇게 상쇄해보려는 듯.
김동인의 광화사는 오랜만에 예술에 대한 진지한 통찰을 해볼 수 있었던 책인 만큼 자못 나의 마음에 드는 소설이었다.